Ⅳ. 열국 쟁웅-계립국 이남의 두 나라
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오늘날의 조령(鳥領), 즉 새재이다. 현재 문경읍 북산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만, 고대에는 조령을 ‘저릅재’라고 불렀다. 여기서 ‘저릅’은 삼을 뜻하는 옛말이며, 이를 이두식으로는 ‘계립(鷄立)’이라 표기하고, 의미적으로는 ‘마목(麻木)’이라 썼다. 따라서 계립령은 곧 조령을 의미한다.
계립령 이남은 오늘날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총칭한다. 이 지역은 계립령을 북쪽 경계로 충청북도와 접하고, 태백산을 동쪽 경계로 강원도와 맞닿아 있으며, 지리산을 남쪽 경계로 충청남도 및 전라남북도와 구분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삼국시대의 여러 국가들이 북쪽에서 각축을 벌이는 동안에도 계립령 이남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과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하고, 낙랑군을 점령했으며, 중국의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켜 사군을 설치하는 등 북방에서는 끊임없는 변동이 있었으나, 진한과 변한은 독립된 자치령으로서 안정된 삶을 이어갔다.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벼, 보리, 기장, 조 등을 재배하며 농업에 종사하였고, 누에치기와 길쌈으로 옷감을 생산했다. 철을 채취하여 북방 여러 나라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특히 변진은 음악을 사랑하여 독자적인 악기인 변한슬(弁韓瑟)을 창조하였고, 이를 통해 문화를 발전시켰다. 변진은 초기에는 마한의 봉토를 받은 유민들이었기에 마한의 절제를 받았으며, 마한이 멸망한 후에는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그러나 그 지배는 소극적이었다. 백제는 변진이 독립적으로 ① ‘신수두’라는 관청을 설치하거나 ② ‘신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적극적으로는 ① 매년 조공을 바치고 ② 토산물을 헌납하게 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진한의 자치령은 신라로 발전하였고, 변진의 자치령은 여섯 가락국(駕洛國) 연맹으로 재편되었으며, 결국 백제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가락국(가라 6국)의 건설
변진의 12개 자치부는 오늘날 경상남도 일대에 세워졌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가라(駕洛)’라 불렀다. ‘가라’는 ‘큰 소(沼)’를 의미하는데, 각 자치부는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두고 큰 저수지를 조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착지를 형성하였다. 이때의 ‘가라’는 이두문으로 ‘가라’, ‘가락’, ‘가야’, ‘구야’ 등으로 표기되었다. 또한 ‘가라’를 ‘관국(官國)’이라 적기도 했는데, ‘관’은 음을 따서 ‘가’로, ‘국’은 뜻을 따서 ‘라’로 읽은 것이다.
기원 42년경, 가락의 자치부 수장들이 김해 귀지봉에 모여 대규모 회의를 열고 김수로와 그의 다섯 형제를 여섯 가락국의 군주로 추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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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가라(新駕洛): 김수로가 다스린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나라로, 신가라는 ‘큰 가라’라는 의미다. 전사(典史)에서는 금관국(金官國)이라 기록되었으며, 가락국 혹은 구야국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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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나가라(彌摩那駕洛): 고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로, 미마나 또는 임나(任那)로 기록되었다. 여섯 가락국 중 가장 강성한 국가로 성장하여 대가야(大伽耶)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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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가라(安羅駕洛): 함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안라, 아니라, 아니량 등으로 불렸다. 시간이 흐르며 ‘아시라’, ‘아라’로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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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라(高靈駕洛): 오늘날의 함창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고령’으로 불리다가 와전되어 ‘공갈(恭竭)’이 되었다. 공갈못(恭儉池)은 그 흔적 중 하나였으나, 조선 광무 시절에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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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뫼가라(別山駕洛): 현재의 성주 지역으로, ‘별뫼’라는 산지에 형성되었다. 이두자로 ‘성산가라’ 혹은 ‘벽진가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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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가라(龜旨駕洛): 고성을 중심으로 한 나라로, 고자가라로 기록되었다. 여섯 가락국 중 가장 작은 나라였기에 소가야(小伽耶)로도 불렸다.
초기에는 형제 연맹국으로 협력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각국은 점차 독립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육가락국에 대한 기록을 누락하였고, 금관국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나라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였다.
신라의 건국
신라의 역사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전하다고 여겨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사료가 많이 소실된 반면, 신라사는 위찬(僞撰), 즉 허구적인 내용이 많아 사료로서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신라는 6부 3성(三姓)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6부는 알천양산, 돌산고허, 무산대수, 취산진지, 금산가리, 명활산고야 등의 마을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양부, 사량부, 점량부 등으로 개명되었다.
신라의 세 성씨(姓氏)는 박, 석, 김으로, 각기 신화적 기원을 가진다.
- 박씨(朴氏):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는 박(朴)의 음을 따서 성을 박으로 정했다.
- 석씨(昔氏): 석탈해는 금궤에서 나왔으며, 까치가 울며 따라왔기 때문에 작변(鵲變)을 따서 석씨로 정했다.
- 김씨(金氏): 김알지는 금빛 궤에서 나왔으며, 이를 따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이러한 신화들은 후대에 각색된 것으로,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예컨대 ‘서라벌’은 ‘새라벌’로, 이는 ‘새라’라는 냇가의 들판을 의미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사량부 출신이었으며, 사량부가 신라로 발전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한의 자치제는 사라지고, 세습 제왕국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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